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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의료, 법, 지역, 사회, 젠더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자 겪고 느낀 코로나19와 일상에 대해 쓴 10편의 글이 한데 엮인 책으로, 목차는 다음과 같다.





서문

코로나19와 '우리'의 일상


1 비대면

시공간에 대한 상이한 감각

추지현(젠더·법·범죄사회학)


2 동선 공개

'K-방역'과 두려움의 역설

유현미(젠더사회학)


3 마스크

불확실성 시대의 마스크 시민권

김재형(의료사회학·낙인연구)


4 신천지

신국의 이민자들, '신천지'의 현상학

박해남(문화사회학)


5 돌봄

인류 살리기로서의 돌봄에 대한 상상

오하나(동(남)아시아연구·농촌사회학)


6 가족

코로나19와 영희네 가족

김미선(사회인구학·가족사회학)


7 노동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공성식(노동활동가)


8 의료

면역이라는 커먼즈와 좋은 의료를 위한 투쟁

백영경(의료연구·페미니즘)


9 민주주의

민주주의자로서 비상사태를 상대하기

장진범(사회이론·도시사회학·정치사회학)


10 모더니티

바이러스의 문화적 기원과 한국의 모더니티

김정환(문화사회학·사회이론)





8월 초에 초판 발행되었으니, 2월 중순 이후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우리 일상에 변화를 가져온 지 반년 만에 나온 셈이다. 기획을 포함하여 필자 모두의 집필 시간, 편집과 디자인에 열중한 시간, 또 인쇄를 거쳐 출간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상당히 숨가쁘게 진행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군데군데 짜임이나 깊이가 설게 느껴졌던 것이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한다.





'확진자, 사망자, 완치자와 같이 매일 갱신되는 자극들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그로 인해 우리의 일상이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가. 아니, 그 아픔이 어쩌면 모른척 덮어왔던 곪아버린 상처는 아닌가.'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가 속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누군가의 이웃으로서, 또 가족으로서, 무엇보다 '나'로서 이 세계를 계속 살아가고 살아내기 위해 많이 생각하고 이야기 나누어야 하는 지점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거리두기와 격리된 생활, 마스크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다. 그렇다고 마스크 없이 살던 그 시절이 과연 좋은 날들이었던가? 그러니까 마스크만 벗으면 되는 것인가? 마스크를 쓰는 일로 상징되는 코로나19의 영향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보고 느꼈는가? 그것이 이 책의 제목을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로 붙인 이유다."

(서문 p.8 중에서)





필자 중 한 명이자 이 책을 엮은 추지현 교수의 이 물음이 곧 이 시대를 겪고 있는 우리 모두의 물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의 말처럼 '더욱 다양한 목소리들을 불러내는 마중물'로써 이 책의 의미는 이미 충분하다. 저마다 다른 키워드로 각자의 경험을 담아 본문을 채운 필자만 해도 무려 10명이지만 결국 이야기의 본질이 하나로 귀결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 10편의 글을 관통하는 가치는 '돌봄과 연대'가 아닐는지. 모두가 부르짖는 비대면 일상이 가능하도록 대면하는 일상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추지현), 대다수가 목숨처럼 지켜나가고 있는 거리를 두는 관계가 가능하도록 돌보고 살피는 사람들(오하나, 김미선)이 있어서 이만큼의 사회가 지속될 수 있었지만 이런 일방적인 돌봄은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


돌봄이 소외되고 고립된 의무감이 되어서는 안 되(오하나)며, 온 국민이 내 일처럼 자랑스러워했던 K-방역도 무더위와 싸우며 콧속에 면봉을 넣어 검체를 체취하고 간호하고 치료했던 '아날로그' 노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백영경)는 것을 기억할 것.


돌봄은 앞이 아니라 뒤를, 위가 아니라 옆과 아래를 돌아봄으로써 시작되(김정환)고, 그렇게 연결된 사회적 존재일 때 우리는 존속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모으는 책.





또 깊이 납득되었던 부분 :





"흔히 감염병 사태를 이야기할 때 우리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것은 전쟁의 은유이다. … '어느 지역이 뚫렸다'는 표현 역시 전쟁의 이미지이며, … 방역이라는 말 자체는 역병을 막는다는 뜻인데, 왜 방역은 전쟁이 되고 안팎의 적을 섬멸하는 이미지가 되는지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 하지만 전쟁의 상상력이 문제인 것은, 결국 전체를 위해서는 소수가 희생될 수도 있고, 승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집단에 대해서는 비난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이다."

(본문 p.201-202 중에서)





이런 내용이었는데, 마지막에 필자가 이야기한 '비난'이라는 것이 결국 '혐오'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정말이지 이러한 사례는 숱하게 접하고 있지 않은가. 공개된 확진자의 동선과 몇 가지 정보만으로 개인의 삶을 재단해 비난을 퍼붓고, 집단 감염이 일어났던 특정 장소나 직업군, 성적 취향에 대하여 논리가 거세된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SNS에서는 이성적인 비판의 글만큼 배설하듯 내뱉는 분노와 혐오의 발언도 환대를 받는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프라이버시 침해나 혐오에 가까운 비난은 놀라울 정도로 처우가 달라진다. '이건 혐오가 아닌 것'이 되거나 '이 정도쯤은 괜찮은 것'이 되거나. 전자의 경우는 당위성을 갖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질 나쁜 암묵적 합의인 것인데 모두 최악 아닌가. 죽을 줄 모르고 사람을 죽인 살인자에게 몰랐으니 죄가 없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가.





위의 글을 읽으며 100%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정말 전쟁의 이미지, 전쟁의 은유라는 것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인가 싶어졌다. 개인보다 단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한국 사회에서라면 더욱. 우리는 너무 쉽게 혐오한다.



















하루하루 격변하는 일상 속에서 7월 말과 8월 초의 상황이 반영되었다면 또 어떤 목소리가 담기게 되었을까, 궁금하고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시간이 더 흐르면 보다 깊고 통찰력 있는 새로운 책들이 나오겠지. 부디 그때는 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지금을 회상하며 되짚어보는 때가 되어 있기를 바란다.





필자들은 또 이야기한다. 당면한 문제는 사회적 위기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드러난 것이라고. 그건 어쩌면 이제라도 우리가





마스크가 말해주는,



그리하여 마침내 마스크 너머의 사람이,


구조가,


사회가,


또, 그리하여 마침내


풍경이 말해주는 것들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