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차분하고 급진적인

 

 

 

장혜영 의원의 의정 보고서가 도착했다.

 

이슬아 작가와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2020년의 의정을 돌아보고 그 내용을 한 권의 책에 담은 것인데, 여느 국회의원에게서도 시도된 적 없는 반가운 소통방식이라는 생각에 후다닥 신청해 받아보았다.

 



장혜영 의원을 처음 알게된 것은 소름 돋는 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이었다. 당시 그는 생각 많은 둘째 언니라는 이름으로 인상 깊게 보았던 책이나 직접 만든 노래, 또 이런 저런 화두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채널을 운영 중이었는데, 우연히 그 채널의 영상을 보게 된 것. 그는 영상 속에서 어떤 시집을 소개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유고시집 《충분하다》를 읽던 무렵이었고, 영상은 바로 그 시집에 대한 것이었다. 여전히 소름 돋는 유튜브 알고리즘이란.

 

아무튼 시간이 흘러 작년 어느 날 그는 정치 시작을 선언하며 선거에 출마했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의정 보고서 《차분하고 급진적인》은 그 시작점에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난 한 해 그가 어떻게 달려 왔는지, 얼마나 달려 왔는지에 대한 자취이기도 하다.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쉽고 구체적이며 따뜻하고 사려 깊은 말들로 채워진 보고서였다. 몇몇 부분은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또 읽었는데 그중 첫 번째는 그가 정치를 시작하기로 결심하며 했던 <공개정치선언문>의 일부로,

 

하지만 사람들의 삶은 미룰 수가 없습니다. 지금 벼랑 끝에 서서 하루하루를 견디다 못해 떨어져나가는 사람들의 삶은 미룰 수가 없습니다. 무참한 불평등 앞에서 꺼질듯이 흔들리는 곳곳의 촛불같은 삶에는 '나중'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지금 당장의 변화를 일으키는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대목이었다. 그런가 하면, 국정감사 기간의 소회를 나누던 중 '상대에게 굉장히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요청을 하는 것 같다'고 묻는 이슬아 작가의 질문에는

 

그래야 회피하기 어려우니까요. 정치는 말로 집을 짓는 일이에요.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나중에 하는 말을 구속하기 때문에 쌓이면 쌓일수록 회피하기 어렵죠. 그러니까 말 한마디를 하거나 반대로 이끌어낼 때는 이 말이 단순히 그냥 공기중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회의 국정감사 속기록에 영원히 남아서 이 다음에 이어질 수많은 정치활동의 토대가 된다는 점을 늘 의식해요. 벽돌을 쌓는 기분으로 말한다고나 할까요.

 

라고 답했다. 또, 차별금지법 관련해서는

 

국회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많은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소수자 문제는 '소수자 문제'이지 모두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적 소수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을 촉구하는 이유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당사자들의 침해당한 권리를 회복함과 동시에 그것이 사회 전체의 복리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이 지점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저에겐 굉장히 중요한 미션이에요.

 

라고 담담하게 소신을 밝혔다. 덧붙여, 한국보다 훨씬 더 이전에 인권법이 도입된 뉴질랜드의 사례를 참고하고자 가진 필립 터너 주한 뉴질랜드 대사와의 대담에서 그가 했던 말을 인용하기도 했는데

 

뉴질랜드 인권법의 목표는 누군가에게 제약을 가하고 처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자신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라는 점이었어요.

 

정말 무릎을 치게 되는 말이다. 모든 차별을 금지하자 목소리를 내는 이들조차도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쉽게 차별과 편견을 담은 시선을 던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평등의 가치를 추구한다면 적어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누가 누구를 제약하고 벌하기 전에 그보다 근본적인 무언가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의정 보고가 끝날 무렵 이슬아 작가의 갈무리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오늘 내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장혜영 의원의 그간의 행보를 쭉 들으면서 저의 글쓰기 스승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어요. 어떤 작가의 글쓰기가 확장되려면, 한 작가가 남의 슬픔을 자기 슬픔처럼 느끼는 경험들이 필요하다고. 남의 슬픔이 내 슬픔처럼 느껴질 때 이 작가의 글쓰기가 겨우겨우 확장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의원님의 세계도 비슷한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얼마나 다양한 문제로 슬플 수 있는지가 이 사람의 정치 세계의 반경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캬-아 정말 최고네.

 

 

 

 

의정 보고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그저 자신이 이룬 어떠한 입법적 성과의 지루한 열거가 아닐까, 생각해왔을 뿐이다.

 

새해 첫 날. 그야말로 차분하고 급진적인 그의 의정 보고서를 읽으며 우리를 살게 하는 힘,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정치적 성향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 본질적인 물음. 이런 의정 보고서라면 서점에서 돈을 주고도 살 것 같다.

 

갬동적이었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