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미국의 한 마을이 사라진다. 엠파이어. 석고보드의 주요 산지였던 이곳은 2008년 들이친 금융위기와 광업의 종말이라는 두 숙명을 고스란히 떠안는 마을이 된다. 우편번호가 폐지된 마을. 펀(프란시스 맥도맨드)도 그곳 주민이었다. 마을의 붕괴. 남편의 죽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펀의 유랑생활은 그렇게, 낡은 밴과 함께 마을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영화 <노매드랜드>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제시카 부르더의 에세이 『노매드랜드: 21세기 미국에서 살아남기』를 원작으로 한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인들의 이야기를 3년간 취재하여 펴낸 이 책을 본 배우 프란시스 맥도맨드가 영화 제작을 결심하고, 물색 끝에 감독 클로이 자오를 직접 캐스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감독이 원작에 펀의 서사를 덧붙여 지금의 <노매드랜드>를 완성했다. 원작은 영화보다 사회비평적 성격이 강하다고 하는데, 노매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사회적 배경을 생각하면 영화에서 덜어낸 날카로운 시각이 책에는 담겨있을 것 같아 읽어보고 싶다. 어쨌든,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출연자 대부분의 극 중 이름이 실제 이름과 같아서 인상적이었는데, 알고보니 아주 잠깐 등장하는 인물에서부터 비교적 비중 있는 주변 인물까지 대부분이 대안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실제 노매드였다. 본인이 본인 역을 연기한 것이다. 연기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사람들. 몸짓, 말투, 아주 작은 표정까지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실제로 배우와 감독, 제작진들이 촬영장에서 카메라만 세팅해놓고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의 분위기를 최대한 존중하는 촬영방식을 택했고, 카메라가 켜져 있지 않은 순간에도 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등 정서적 유대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출연자 중 한 명인 스왱키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치 오래 전에 연락이 끊긴 친구가 와서 다시 재회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영화를 찍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받고 필요하고 인정받는 존재라고 느꼈다."
그 느낌은 곧 영화의 정서이기도 하다.
아마존 물류센터, 캠핑장, 식당, 농장, 공사장 등을 돌며 일하고 저녁이면 주차장 한 켠에 세워둔 집으로 돌아가는 펀의 투박한 등 뒤에도, 이따금 하늘인지 땅인지 경계를 알 수 없는 끝없이 먼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펀의 텅 빈 눈동자 속에도 결코 동정이나 연민이 스미지 않는다. 노매드의 고단한 삶을 다룬 영화에서 관객이 예상하는 딱함이나 안쓰러움 대신 담담함이 묻어나는 감독의 시선이 좋았다.
공허할 때도 있지만 그럭저럭 풍요로울 때도 있는 삶.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삶. 삶에는 정답이 없다고 말하는 시선. 이 작품에는 짙은 푸른색의 시간대가 자주 등장한다. 이를테면 동이 틀 무렵이나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 삶에 색이 있다면 왠지 그 짙은 푸른색일 것 같다. 아침인지 밤인지, 하루의 시작인지 끝인지, 경계가 불분명해 알 수 없는 짙은 푸른색. 꿈 같기도 실제 같기도.
'홈리스(Homeless)냐'는 물음에 '그냥 집이 없을 뿐(Houseless)'이라고 답하는 펀을 보며, 또 '내가 사라지면 고아였던 남편이 이 세상에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아서 살았다'고 이야기하는 펀을 보며, 나는 나의 삶을 자문한다.
내 '집'은 어디인가. 기꺼이 안주하여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은. 그 집은 장소인가, 사람인가, 시간인가. 내게는 그런 집이 있는가.
기형도 시인의 시 <빈 집>이 생각났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억하기 위해 나아가고 나아감으로써 마침내 찾게 되는 나만의 집. 집을 찾는 삶. 삶이라는 노동. 여기는 노매드랜드.
영화를 보고 나면 아! 하게 되는 또 다른 포스터. <노매드랜드> 역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비롯하여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각색상, 편집상에 후보지명이 되었는데, 역시 조심스럽게 여우주연상과 작품상, 그리고, 그래요, 기분입니다, 촬영상까지 예측해본다. 그러니
편집상은 <더 파더>주세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