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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이번 휴가엔 너다,










 

하고 찜해둔 진은영 시인의 새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를 데려가 읽다가









 

 

   아빠 미안
   2킬로그램 조금 넘게,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미안
   스무 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

쿵 내려앉는 마음.




 

   엄마 미안
   밤에 학원 갈 때 휴대폰 충전 안 해놓고 걱정시켜 미안
   이번에 배에서 돌아올 때도 일주일이나 연락 못 해서 미안

쿵 하는 마음은 이제
우리가 아는 이야기로. 그날로.
더는 내려앉을 곳도 없이.









 

 

   그날 이후



   아빠 미안
   2킬로그램 조금 넘게,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미안
   스무 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

   엄마 미안
   밤에 학원 갈 때 휴대폰 충전 안 해놓고 걱정시켜 미안
   이번에 배에서 돌아올 때도 일주일이나 연락 못 해서 미안

   할머니, 지나간 세월의 눈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해서 미안
   할머니랑 함께 부침개를 부치며
   나의 삶이 노릇노릇 따듯하게 익어가는 걸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

   아빠 엄마 미안
   아빠의 지친 머리 위로 비가 눈물처럼 내리게 해서 미안
   아빠, 자꾸만 바람이 서글픈 속삭임으로 불게 해서 미안
   엄마, 가을의 모든 빛깔이 어울리는 엄마에게 검은 셔츠만 입게 해서 미안

   엄마, 여기에도 아빠의 넓은 등처럼 나를 업어주는 뭉게구름이 있어
   여기에도 친구들이 달아준 리본처럼 구름 사이에 햇빛이 따듯하게 펄럭이고
   여기에도 똑같이 주홍빛 해가 저물어
   엄마 아빠가 기억의 기둥들 사이에 매달아놓은 해먹이 있어
   그 해먹에 누워 한숨 자고 나면
   여전히 나는 볼이 통통하고, 암전한 귀 뒤로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아이
   슬픔의 대가족들 사이에서도 힘을 내는 씩씩한 엄마 아빠의 아이

   아빠, 여기에는 친구들도 있어
   이렇게 말해주는 국어 선생님도 있어
   "쌍꺼풀 없이 고요하게 둥그레지는 눈매가 넌 참 예뻐"
   "너는 어쩌면 그리 목소리가 곱니,
   생머리가 물 위의 별빛처럼 그리 빛나니"

   엄마! 아빠! 벚꽃 지는 벤치에서 내가 친구들과 부르던 노래 기억나?
   나는 기타 치는 소년과 노래 부르는 소녀들 사이에 있어
   음악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털을 가진 고양이들과 있어
   내가 좋아하는 엄마의 밤길 마중과 분홍색 손거울과 함께 있어
   거울에 담긴 열일곱 살, 맑은 내 얼굴과 함께, 여기 사이좋게 있어

   아빠, 내가 애들과 노느라 꿈에 자주 못 가도 슬퍼하지 마
   아빠, 새벽 세 시에 안 자고 일어나 내 사진 자꾸 보지 마
   아빠, 내가 친구들이 더 좋아져도 삐치지 마

   엄마, 아빠 삐치면 나 대신 꼭 안아줘
   하은 언니, 엄마 슬퍼하면 나 대신 꼭 안아줘
   성은아, 언니 슬퍼하면 네가 좋아하는 레모네이드를 타줘
   지은아, 성은이가 슬퍼하면 나 대신 노래 불러줘
   아빠, 지은이가 슬퍼하면 나 대신 두둥실 업어줘
   이모, 엄마 아빠의 지친 어깨를 꼭 감싸줘
   친구들아, 우리 가족의 눈물을 닦아줘

   나의 쌍둥이, 하은 언니 고마워
   나와 손잡고 세상에 와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여기서, 언니는 거기서 엄마 아빠 동생들을 지키자
   나는 언니가 행복한 시간만큼 똑같이 행복하고
   나는 언니가 사랑받는 시간만큼 똑같이 사랑받을 거야
   그니까 언니, 알지?

   아빠 아빠
   나는 슬픔의 큰 홍수 뒤에 뜨는 무지개 같은 아이
   하늘에서 제일 멋진 이름을 가진 아이로 만들어줘 고마워
   엄마 엄마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들 중 가장 맑은 노래
   진실을 밝히는 노래를 함께 불러줘 고마워

   엄마 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2015년, 서른 네 명의 시인이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 한 명 한 명의 목소리를 대신해 시를 발표했다. 「그날 이후」는 故 유예은 학생의 열일곱 번째 생일을 기리며 진은영 시인이 쓴 시. 그의 새 시집에 다시 실렸다.









 

이상야릇한 시집이다.

사랑도 넘치고 죽음도 넘치는.
낭만 가득하나 절망도 가득한.

그렇지만 견고한.
그래서 벅차오르는.










시인은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첫 시 「청혼」을 두고

 

Q. 화자는 조심스럽고 겸손한 약속들로 사랑을 고백한다. 빛나고 희망찬 선언을 하지 않는 이유가 뭔가?
A. ···사랑하는 게 참 어려운 일이다. 항상 우리가 의도했던 것과 가장 다른 결과를 낳는다. 나는 돌멩이를 줬는데 그걸 보석이라고 받기도 하고, 나는 소중한 걸 내어줬는데 그걸로 다치기도 한다. 간극이 있다. 그래서 ‘미래는 행복할 거야’ 같은 믿을 수 없는 아첨을 하지 않는 게, 태도밖에 줄 게 없는 가난한 사람의 말일 거라 생각했다.···이런 태도의 성실성이 거듭되는 절망 가운데서도 우리(공동체) 스스로를 지켜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이야기를,










 

   죽은 엄마가 아이에게




   진흙 반죽처럼 부드러워지고 싶다
   무엇이든 되고 싶다

   흰 항아리가 되어 작은 꽃들과 함께 네 책상 위에 놓이고 싶다
   네 어린 시절의 큰 글씨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알맞게 줄어드는 글씨를 보고 싶다
   토끼의 뒤 귀처럼 때때로 부드럽게 접힐 줄 아는 네 마음을 보고 싶다
   베여 나간 나무 밑동의 향기에 인사하듯 길게 구부러지는
   너의 훌쩍 자란 등뼈를 만져보고 싶다

   세상의 비밀을 전해 듣고
   분노 속에서 네가 무엇도 만질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낄 때
   단 하나의 사물이 되고 싶다
   네 손에 잡혀 벽을 향해 던져지며 부서지는 항아리가
   단단하게 굳어 제대로 모양 잡힌 기억이

   한밤중에 일어나 네가 연인의 잠든 얼굴을 한번 만져 보고
   나쁜 꿈의 물풀들을 천천히 쓰다듬는 날들이 지나가고
   너의 늙어가는 얼굴 가득 물결처럼 번지는 주름을 보고 싶다
   공원 벤치에 잠시 지팡이를 세워두고
   새벽별들처럼
   아침이 고요하게 거둬들이는
   네 마지막 숨결을 느끼고 싶다

   "찾아 주세요. 사위 권재근, 손자 혁규.
   아직도 차가운 바닷속에 있나 봐요. 저는 베트남에서 왔어요."

   진흙 반죽처럼 부드러워지고 싶다
   무엇이든 되고 싶다
   지금 내 곁의 빈 나무 관 속을 떠돌며
   반쯤 지워져가는 네 얼굴 위로 내려앉기를 기다리는 마른 먼지만
   아니라면

   진흙 반죽처럼 부드러워지고 싶다
   너를 위한 기억의 데스마스크로
   망각 법원의 길고 어두운 복도마다 걸리고 싶다
   무겁게 쌓인 먼지를 털면
   가장 오래된 슬픔의 죄수들이
   쇠창살 사이에서 기웃거리는 표정처럼

또 「죽은 아이가 엄마에게」에 대해서는


Q. ‘곁에 있겠다’는 약속은 ‘사물이 되겠다’는 시구로도 표현되는데?
A. ···고통은 관통하며 지나가는 것이어서 그것을 겪은 사람은 참담하게 무너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그 사람이 완벽한 위로를 해줘서가 아니라 그저 옆에서 ‘내가 당신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겠다’ ‘사물처럼 어디에도 가지 않고 있겠다’고 해주는 것이 고통을 견디게 하더라.···어떤 존재의 옆을 지키는 건 굉장히 어렵고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
이상야릇할 수밖에.

죽음의 곁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막막한 절망을 기꺼이 드러내는

시인의 태도가.
그의 시가.


 

우리 모두 조금쯤
이상야릇해지는 것은 어떨지.

하지만 그도 말했듯이
어려운 일이다.










요즘 읽고 있는

 

김혜리 기자의 영화 산문집
『묘사하는 마음』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이와 같은 소재에 접근하면서 숀 베이커 감독은 외부자로서 취하기 쉬운 분노나 동정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내려다보지 않고 옆자리를 지키며 그들의 삶에 내재한 아름다움과 어두움을 그대로 파악하고자 한다. '궁핍한 삶'에서 방점은 '궁핍'이 아니라 '궁핍이라는 조건을 수반한 삶'에 있어야 한다고 숀 베이커의 영화는 믿는다.···관객을 이끌고 무니의 세상을 기웃거리며 뛰어다니던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마지막에 이르러, 마치 지금껏 한 번도 달리지 않았던 것처럼 달려 나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 장의 맺는 말은



 

마치 부표처럼
그의 책 머리말에서부터
잠연히 부유한다.



 

 

 

 

 

 

 

진은영 시인의 시와 인터뷰 기사를 읽고 우연히 김혜리 기자의 산문을 읽으며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하나로 포개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누군가





예술이 뭐냐고 물으면
모르겠다.

시나 영화, 또
음악이 뭐냐고 물으면
역시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가져야 할 태도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어쩐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 이상야릇한
염려와 사랑에 대해.










[인터뷰] 진은영 x 『시사IN』

 

10년 만에 돌아온 '사랑의 시인'

“제목이 조금 낭만적일 뿐, 슬픈 이야기만 가득한 시집”이 나왔다. 등단 22주년을 맞은 진은영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이다. 시인의 자평에도 불구하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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