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남겨진 이들의 몫

고등학생이던 나는 그날도 학교로 향했다. 아직 한적한 교실에는 드문드문 친구들의 가방. 나도 가방을 내려놓고 그곳으로 향했다. '역시 여기 있었네' 하면서.


그 시절 우리의 하루는 배가 고파도 고프지 않아도 매점에 모여 간밤에 밀린 수다를 떠는 것으로 시작되고는 했다. 어깨동무를 하고 깔깔대면서도 입은 한시도 쉬지 않고 분주했다. 완벽하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던 그때. 매점 한쪽에 놓여있던 TV로 우리의 시선이 모아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유유히 날던 비행기 한 대가 높은 빌딩으로 돌진하자 이윽고 붉은 불기둥과 시커먼 연기구름이 새파란 가을하늘을 방해하듯 솟구치던 장면. 2001년 9월 11일의 일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은 이제 희미하지만 그 장면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2017년 9월 11일.







그날의 그곳에 있게 되었다.


비극은 긴 시간에 서서히 닦여 멀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네모 반듯하게 각이 진 난간을 따라 아로새겨진 희생자들의 품 깊은 곳으로 쉼없이 쏟아지던 물줄기. 이제 이곳은 그라운드 제로라 불린다. 떠나간 누군가의 배우자가, 자녀들이, 또는 조카가, 더러는 동료들이, 여전히 그들을 기억하는 곳. 기억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가는 곳. 나는 그곳에서 또 다른 어느날을 떠올렸다. 



아침 저녁으로 아직은 쌀쌀했던 봄날이었다. 출근 중이었고, 붐비는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있었던, 그 언젠가처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날이 될 뻔했던 날. 차가운 바다 밑으로 수많은 생이 가라앉았던 그날은 2014년 4월 16일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라지고 말 존재'를 향한 애정과 '사라지고만 존재'에 대한 기억으로 채워진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영원하지 않기에 사랑하게 된달까.


한철 피었다지는 꽃이 그렇고, 한 시절을 함께 보낸 반려동물이 그렇다. 해마다 돌아오는 것 같아도 때마다 다른 봄이라는 계절은 그래서 늘 아쉽다. 사람도 물론이다.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마침내 사라져버릴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밀려오는 슬픔에 어쩔 도리가 없다. 언젠가 끝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으면서.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날이 9월 11일일 줄, 또 4월 16일일 줄, 몰랐을 것이다. 준비 없이 찾아온 그날은 남겨진 이들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무력하게 하고 절망하게 했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적어도 우리가 이런 느닷없는 슬픔은 느끼지 않도록,







잊지 않는 것.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그래서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





남겨진 이들의 몫일 것이다.





오늘의 스페인어


Lo recordaré.     /     기억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