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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인찍힌 몸

혼혈인

흑단 같은 피부

한국형 미인

조선족

그리스 조각 미남

히잡 쓴 여성

백옥 같은 피부




띠지에 작은 글씨로 새겨진, 너무나 흔해


이게 뭐?

이게 왜?


싶은 이 표현들로 우리는 얼마나 아무렇지도 않게 타자의 '몸'을 규정짓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왜 '몸'을 통해 차별하고 차별받는 역사를 살아와야 했으며 또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가.



『낙인찍힌 몸』은 그 물음의 여정이다.





1장에서는 '인종'의 개념이 언제·왜 생기게 되었는지와 더불어 이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두 갈래의 학문적 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간추려보면 이렇다.


'인종'의 개념은 15-6세기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할 위기를 면하고 생존하기 위해 개종한 유대인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되었다. '피'가 다르기 때문에 동화될 수 없다는 논리는 결국, 특정 인간에게 동물의 혈통이나 품종을 가리키는 스페인어 '라사(raza)'를 적용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집단 내부의 가계와 혈통을 가리키던 인종이 17세기 말, 아메리카 대륙 정복 시대의 도래와 함께 점차 집단과 집단 사이의 차이에 주목해 인류를 분류하는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인류를 피부색으로 분류한 최초의 자연학자 린네와 그리스의 조각상을 예찬하며 인체미의 이상을 제시한 미학자 빙켈만을 시작으로 끝없이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화하며 고착되기 시작했다.





앞서 소개된 역사적 배경을 따라 어느새 열등한 집단 속 일원이 되어버린 흑인은 어떻게 흑인으로 '만들어'졌는가. 2장은 그들의 몸에 아로새겨진 차별과 저항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몇 구절을 발췌해본다.


p.90

'흑인'을 '흑인'이라 호명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백인이다. 백인은 보는 주체고 흑인은 보이는 대상이다. 흑인과 백인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는 시선의 비대칭성에서 나오는 권력 문제에 다름 아니다. 


p.93

흑인이 자신의 몸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은 늘상 제3자인 백인의 시선에 의해 재단됐다. 그리고 백인 중심의 세계에서 유색인은 자신의 몸에 대해 온통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될 수밖에 없었다.


p.104-105

흑인의 몸에 동물성과 열등성이라는 가치판단이 달라붙은 계기를 말하려면 노예제의 역사를 빼놓을 수 없다. … 흑인이라서 노예가 아니라, 노예라서 흑인이다. … 근대 노예제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아프리카인의 강제노동으로 해결하는 데서 생겨났다. 이후 흑인의 육체에 대한 사회적 범주로서 인종 개념이 고안됐고, 인종만들기 과정을 거쳐 정교한 인종주의 이론이 생성됐던 것이다.


p.137

본격적인 인종주의는 노예무역과 노예제폐지 이후에 전개되었다. 즉, 합법적 제도로서 뒷받침되던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 백인과 흑인 사이의 우열관계를 입증해야 할 필요는 더욱 절실해졌던 것이다.


p.140

백인 중심의 노예제폐지 운동 중심의 기억을 넘어서, 아프리카인 홀로코스트 '마파(Maafa)'를 기억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노예를 수동적 존재로 재현하는 이미지를 전복하는 일이다. 스테레오타입의 영속화야말로 노예제의 가장 나쁜 유산이기 때문이다.





3장은 여성. 노예이자 여성. 흑인이자 노예이자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성과 인종과 계급차별이 교차하는 '배틀그라운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 인상적이었던 부분:


미국의 노예제폐지 운동가이자 여성권리 운동가 트루스가 제시한 흑인 여성의 여성성에 대한 시각이었다. 즉, 흑인이자 노예이자 여성이었던 자신 혹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성들을 바라볼 때 여성이나 노예 어느 한쪽의 정체성만으로 국한할 수 없다는 것. 인종, 계급, 젠더의 교차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안에서 저마다 차별의 우열을 겨루는 소모적인 논쟁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러한 생각은 우열이 아닌 본질을 응시해 차별의 구조를 비판함으로써 연대를 꿈꾸는 '블랙페미니즘'의 기원이기도 했다. 


꼭 '흑인 노예 여성'의 삶이라서가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차별과 억압에 분노하는 이들에게도 분명 울림이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4장에서는 종교적 타자에서 인종적 타자로, 오랜 세월 반유대주의의 그늘 아래 살았던 피해자 유대인이 어떻게 내부의 인종차별을 제도화하며 백인 중심의 배타적 유대인 국가 만들기를 도모하는 가해자 유대인으로 변모해가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몇몇 구절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p.223

사실 반유대주의는 유럽문화권에서 그 역사를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오래되고 광범위하게 뿌리내린 차별이다. 하지만 19세기의 반유대주의는 과거의 것과 달랐다. … 유대인 해방과 반유대주의는 동시대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 종교적인 '유대주의'를 생물학적인 '유대인다움'으로 대체해야 할 상황이 온 것이다. 그렇게 유대인은 생물학적 '인종'으로 정의되기 시작했다.


p.229

이후 나치 시대의 유대인은 온갖 부정적인 신체적 특징을 지닌 혐오스런 존재로 묘사됐다.


p.247

이스라엘은 건국 초기부터 홀로코스트 희생자인 나약한 유대인과 대비되는 강인한 유대인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강인한 유대인의 기원은 시온주의에 있었다.


p.250

그러나 실제로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의 최대 희생자라는 도덕적 명분을 내세우는 동유럽 아슈케나짐이 주류를 이루는 국가로 건설됐다. 같은 유대인이지만 미즈라힘베타 이스라엘은 2등 시민의 지위로 내몰렸다. 


p.259

결국 19세기 인종주의가 만들어낸 '백인'과 '흑인'의 인종 구분과 백인우월주의에 의한 차별이 현대 이스라엘에서 새롭게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타자로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린 또 다른 존재들. 5장에서는 무슬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식민지였던 이슬람 세계에서 유럽으로 이주해온 무슬림 시민들은 유럽인들에게 잊고 싶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이며 이것이 이슬람포비아의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무슬림에게 느끼는 혐오와 공포의 감정을 차별과 폄하로 상쇄하고자 하는데 활용되는 것이 바로 '문화정치'이며, 여기에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무슬림 여성들의 '베일'이라고 말한다. 종류도 용도도 의미도 다양한 한낱 스카프 이상의 무엇으로써 베일은 서구사회를 관통하며 '이슬람 종교과 문화는 원래부터 젠더불평등한 것'이라고 하는 '젠더화된 이슬람포비아'를 양산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강제결혼, 여성성기절제, 일부다처제, 명예살인 등 여성인권유린과 이어지는 문화적 관행들을 담론화하여 끊임없이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내재하게 된다고도 덧붙인다.


물론, 그들의 '문화적 관행'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20000%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차별을 위해 또 다른 차별이 이용되는, 그 볼모가 여성의 몸이라는 점은 너무나 씁쓸한 지점이다.





마지막 6장에서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으로 한국 안에서 벌어지는 편견과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데, 어떤 두 단어에 마음이 찔렸다.



다문화

결혼이주자와 그 자녀, 혹은 가정을 수식할 때 흔히 사용하지만 정작 이주민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말. 한국사회에서 '다문화'는 '한국문화'와 '한국문화를 제외한 외국문화'라는 선긋기가 분명한 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문화가 아닌 외국문화'를 지칭하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유럽문화', '미국문화'라는 말과 함께 '다문화'는 별개로 쓰고 있기 때문. 나 역시 마음 속 어딘가에서 대충 그런 그림을 그려놓고 사용했던 단어 같아 뜨끔했다.


'불법'체류가 아닌 '미등록' 체류

확실히 '불법'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부정적이다.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따지는 것은 제도를 통해 판단되겠지만, 인류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이주하고 정착하며 살아온 인간에게 간단히 불법이라는 낙인을 찍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인식의 전환을 시사한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이주할 권리가 있으며, 의지와 무관하게 터전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인권침해일 수 있는 것. 규정짓는 것에는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쉽게 읽히는 책은 좋은 책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쉽게 읽히는 책이 좋다.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읽히도록 쓴 책은 더욱 좋다. 말도 글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멋진 것 같다. 이 책도 그렇다. 본문의 내용만 해도 400페이지에서 살짝 모자란 제법 두꺼운 책이지만 훌훌 잘 읽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편집자의 고민이 느껴지는 만듦새






표지를 열면 이렇게 반짝이는 엷은 금색의 속지 뒤로 제목이 뿌옇게 비치는데, 들추면 또





깔-끔

(저 펄 좀 보라지)





각 장의 여는 페이지는 이렇게 표지와 톤을 맞추었다. 그런데 각 장마다 똑같은 색 배합이었으면 이게 또 엄청 인스턴트같고 촌스러웠을텐데 그렇지가 않은 것이 차밍포인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덧붙여, 내지의 촉감도 낯설지만 호감이었다.





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러니까 뭐냐하면ㅋㅋㅋㅋㅋㅋㅋ부드러웠다는 말인데ㅋㅋㅋㅋㅋㅋㅋ많이 느껴본 그런 부드러움은 아니고 약간 뭐랄까ㅋㅋㅋㅋㅋㅋ그런 건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그랬다.

(정색)



책을 만든 뒤로는 내용만큼 편집에도 애정이 생긴다.













책날개에 짧게 실린 저자 소개글 마지막에 "앞으로 역사와 몸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면서 특히 장애를 입은 몸을 주제로 연구할 계획이다" 라고 쓰여있던데









기다릴게요!

: )